기독교

1 나는 진짜 그리스도인인가? - A. W. 토저

문성식 2011. 8. 29. 23:46

 

 

나는 진짜 그리스도인인가?

A. W. 토저

요즈음 기독교계는 세상과 적당히 보조를 맞추어 살도록 부추기는 평안한 복음들로 가득차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평안한 복음을 믿고 열심히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자신이 진짜 괜찮은 그리스도인이 된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세상에서도 교회에서도 모든 것과 호흡이 잘 맞아 돌아가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바라시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사람은 세상이나 주위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기보다는, 오히려 세상과 충돌하는 한이 있더라도 진리를 따라 살며, 날마다 자신이 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는 열렬한 신앙과 스스로를 살피는 경건함 속에서 살아 갈 것이다.

A.W.토저(Aiden Wilson Tozer, 1897~1963) 같은 목사님이 계셨던 것은 기독교계에 큰 축복이었던 것 같다. 그는 “이 시대의 선지자”라는 평판을 들었다. 그는 교회의 부패한 현실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타협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강력하게 선포했다.

토저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그가 깊이 있는 말씀의 이해와 박식한 신학적 이해를 눈물의 기도로 반죽하여 개혁의 메세지로 전할 때에 많은 크리스천들의 가슴을 치게 만들었다. 그는 오직 성령과 말씀으로써만 심령을 부흥시키는 설교자였다. 그는 평생 교회와 크리스천의 삶의 개혁과 부흥에 관한 40여권의 명저들을 저술했다. 그는 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라는 복음주의 교단의 목사였다.

그는 물질만을 추구하는 현대 자본주의가 생산해 낸 “교회의 자본화”와, 그리스도인의 가야 할 길인 성화 대신 평안과 행복만을 추구하는 오염된 신앙, 명예는 추구하지만 십자가는 부인하는 가짜 신앙, 그리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부흥을 기획하지만 성령이 메마른 교회, 신자 수의 증가를 위한 비지네스적인 영업법을 도입한 “회개 없는 그리스도 영접”, 체험은 있지만 신학이 없는 신앙과 죽은 정통만을 간직한 채 하나님을 만난 뜨거운 감격이 없는 신앙으로 전락한 현 시대의 신앙의 허상을 날카롭게 고발하고 있다. 진짜 신앙과 가짜 신앙을 정직하게 파헤친 그의 글들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진단해 보자. - 편집실 -

1. 진짜는 험한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모순처럼 보이는 진리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 신앙을 과학, 철학 및 그 밖의 자연적이고 합리적인 것들과 조화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역설적이며, 기독교의 신앙 체계의 뿌리에 놓여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하나님의 역설이다. 증명될 수 있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신앙이 필요 없다. 신앙은 실험이나 논리적 증명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한다.
십자가는 “자연인”, 곧 “거듭나지 못한 사람”과 완전히 대립된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철학은 자연인의 사고와 정면 충돌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라고 단언했다(고전 1:18 참조).

그리스도인의 역설, 하나
그리스도인의 역설은 여러가지 면에서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고 믿지만 전보다 더 충만한 삶을 누리며, 또한 영원히 살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이 땅에서 활동하지만 동시에 하늘에 앉아 있다. 비록 이 땅에서 태어났지만 거듭난 후에는 더 이상 이 땅이 고향이 아님을 믿는다.

공중에서는 아름답고 우아하지만 땅에 내려오면 서툴고 보기 흉한 쏙독새처럼 그리스도인은 천상의 자리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그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살아가는 방법들과는 잘 조화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아들로서 이 땅의 사람들 중에서 승리를 거두려면 세상의 방법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그와 반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는 안전하기 위해서 오히려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며,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잃어버린다. 만일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려고 시도한다면 오히려 생명을 잃을 위험에 처한다. 높아지려면 낮아져야 한다. 낮아지기를 거부한다면 이미 낮아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낮아진다면 이미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가장 약할 때 가장 강하고, 가장 강할 때가 가장 약하다. 가난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부유해지면 그 능력이 사라진다.

그리스도인의 역설, 둘
남에게 가장 많이 주면 자신이 가장 많이 소유하게 되고, 가장 많이 소유하려고 하면 가장 적은 것이 남는다. 가장 낮아졌다고 느낄 때 가장 높이 있으며, 자신의 죄를 가장 많이 깨달을 때 가장 죄가 적다. 자신의 무지를 깨달을 때 가장 지혜로우며, 자신이 가장 많은 지식을 쌓았다고 믿을 때 가장 무지하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많은 일을 하는 것이고, 가만히 서 있는 것이 가장 멀리 가는 것이다. 고난 중에 기뻐할 수 있으며, 슬픔 중에도 행복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구원을 얻었다고 믿지만, 장차 구원 얻을 것을 기대하면서 소망 중에 기뻐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에 대해 공포심을 갖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임재에 완전히 압도되어 자신이 망했다고 느끼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한다. 그는 자신의 죄에서 깨끗케 되었음을 알지만, 자신의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음을 알고는 괴로워한다.


그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분을 가장 사랑한다. 자신이 비록 보잘 것 없고 초라한 존재이지만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분과 친구처럼 대화한다. 그는 자신이 본래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느낀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치욕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음을 확신하며, 하나님에게는 가장 보배로운 존재인 것을 감사한다.

그리스도인은 놀라운 존재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철저한 비관주의자이며, 동시에 낙관주의자이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는 비관주의자가 된다. 왜냐하면 그는 십자가에서 영광의 주님에게 쏟아진 심판이 모든 사람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는 심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도 밖에서 인간적인 소망을 찾으려는 시도를 거부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려는 인간의 노력이 아무리 고결한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 사상누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비관주의자이면서 동시에 평온한 낙관주의자이다. 십자가가 온 세상에 유죄선고를 내린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온 우주에서의 선의 궁극적인 승리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결국 모든 사람들의 문제들이 전부 해결될 것이며, 그리스도인은 이 궁극적인 승리를 기다린다. 그렇다! 이토록 그리스도인들은 “믿기 힘들 정도로” 참으로 놀라운 존재이다!

험한 십자가의 길
그러나 예수님을 “받아들이는(영접하는) 행위로써”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시작한다는 주장이 맞는 말이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기독교는 받아들임과 거부, 긍정과 부정을 모두 포함한다. 이것은 회심하여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뿐만 아니라, 그 후에 신앙생활을 계속할 때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즉, 그리스도인이 평생의 싸움을 다 마치고 본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날마다 이 진리는 적용된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리스도가 미워하시는 것들을 모두 거부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생활에는 부정적인 면도 있고 단점도 있다. 그렇다. 분명히 단점이 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부르실 때, 결코 쉬운 길을 제시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우리가 지금 전도할 때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꺼리는 것들을 주님의 제자들에게 서슴없이 말씀하셨다. 오늘날의 전도자들 중 주님처럼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13)라고 말할 용기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리고 안타깝게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이토록 험하고 힘든 신앙의 길을 갈 수 있는 도덕적 능력 자체가 없다.

오늘날의 도덕적 풍토는 우리 주님과 사도들이 가르친 엄하고 질긴 신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현재 종교적 온실에서 만들어지는 허약하고 깨지기 쉬운 성도들은, 과거에 목숨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증거하다가 죽어간 신자들에 비교하면 참으로 한심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책임은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에게 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희생없이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말할 뿐이다.


오늘날 교회들은 유약한 그리스도인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무엇인가 재미있는 것들로 즐겁게 해주어야만 교회에 나온다. 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죄를 미워해야 하며,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신을 거부해야 하며, 선한 길을 따르기 위해서는 악한 길을 떠나냐 한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이 언제 깨달을 것인가? 이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면서 앞으로 전진할수록, 그리고 높이 올라갈수록 우리 앞에는 더 많은 어려움이 놓여 있고, 우리 영혼의 공격이 더 거세어진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어려움과 고난의 길을 즐거움으로 가며, 또한 그 고난을 해결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을 따라서
비유를 들어 말하자면, 성령 충만한 삶은 강도들이 창궐하는 숲을 통과하는 순례의 길이요, 마귀와 처절하게 싸우는 전쟁이다. 성령 충만하면 언제나 갈등이 있게 마련이다. 때로는 자신의 본성과 사력을 다해서 싸워야 할 때도 있다. 우리가 완전히 승리하는 방법은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